교회 설립 이야기
- 내가 아는 승동교회
- 곽안전 선교사 / 1971.6월 ~ 1972.1월까지 승동지 연속 기고문 中
승동교회는 원래 그 전에 두 개의 서울 교회들을 연합하여 조직된 교회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곤당골교회인데, 現 반도호텔(웨스틴조선호텔)이 서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1893년에서부터 1901년까지 있다가 구리개(동천) 쪽으로 옮겼는데(現 을지로 2가, 내무부 청사 근방) 병원 옆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병원을 제중원이라고 했는데, 세브란스병원의 둘째 조상이었습니다.
첫번째 병원은 고종황제의 지시에 따라 홍영식씨가 전에 살던 집에서 1885년 2월에 알렌 의사가 광혜원이라는 첫 번째 병원을 만든 것입니다.
그 장소는 창덕궁 서쪽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안수를 받은 한국 목사가 아직 없었으므로 남장로교 선교사이신 이눌서 목사가 1902년부터 1905년까지 곤당골교회 원목사로 곽안련 목사는 부목사로 부임하셨습니다. 곽안련 목사는 1902년에 한국에 오셔서 어학공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1905년에 교회가 승동(現 인사동) 자리로 옮긴 때로부터 곽목사는 이 새로 연합된 교회의 목사로 계셨고 1922년까지 책임을 지고 계셨는데 그 동안 여러 한국 목사들이 부목사로 같이 교회 일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 후에 두번째로 합한 교회는 홍문수골교회이었는데 독립교회로서 1900년부터 현 을지로6가 근방에 있었습니다. 후에는 땅을 팔아, 돈을 그 당시에 시내에 셋 밖에 없던 새문안, 승동, 연동의 세 장로교회 사이에 나누었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한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1887년에 조직되었고, 연동교회는 1890년 경에 세워졌습니다.
다음으로 오래된 장로교회는 안동교회와 남대문교회인데 1908년과 1909년에 각각 설립되었습니다.
안동교회는 원래 승동교회 사람들이 개척한 교회인데, 1908년부터 전도를 시작하여 1909년에 초가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개축하고 주일 오후와 목요일 저녁예배를 약 2년동안 계속 한석진 목사가 담임으로 맡으셨습니다.
그리하여 1911년에는 승동과는 관계를 끊고 독립교회로 되었습니다.
곤당골 교회는 처음에 교인 16명으로 시작하여 일년에 43명의 교인으로 되었습니다.
그때 그 설립자이신 무어(Rev. Samuel F.Noore)목사는 한국에서 백정들이 가장 낮은 계급으로 취급되고 갓도 못 쓰는 사정을 측은하여 생각하고 고종황제에게 사정을 올려 이 사람들도 갓을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백정들은 너무나 기뻐서 잠잘 때도 갓을 벗지 못하고 잤다고 합니다.
(당시에 베게는 나무로 만든 목침이었던 까닭에 머리 밑에 베고 자고 갓은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박이라는 한 백정이 교인으로 있다가 이 기회에 갓을 쓰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나서 양반교인들이 절대로 이런 백정과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여 얼마 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나중에 다시 나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꼭 일반이다 동들하다 하지만, 이 양반된 사람들은 어릴때부터 그렇게 배우지 못하고 자라났으니까 백정이 양반을 만나서 "형님"이라고 부르면 별로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양반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배워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1896년에는 내부로부터 각 도로 서신이 나갔는데 내용인즉 이제부터 백정도 다른 시민들과 같이 갓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거의 실천이 되어갔지만 시골에서는 백정이 갓을 쓰고 다니면 양반들은 그를 만나서 욕을 하고 "너 개XX야, 왠 갓을 쓰고 다니느냐?"고 했습니다
하인들도 백정들을 천히 여기고 존대말도 쓰지 않았을뿐더러 아이들까지도 그랬습니다.
이 박씨는 기독교 책을 한 권 사보고 예수를 믿고 그 아들 봉출이를 곤당골교회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다른 기독교 서적들을 권하니까 아버지는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얼마 안되어 박씨가 심한 병으로 앓고 있었는데 선교 의사이신 어비신(애비슨, O.R.Avison)의사가 박씨의 집에까지 와서 치료해주니까 이것으로 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비신 의사는 고종황제의 어의인데 어찌 우리 초가집까지 와서 나를 치료해 주는가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병이 완쾌된 후에 그의 아들의 권면을 듣고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씨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환영할 일이건만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인의 대부분이 양반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에 다니지 못하겠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믿기는 하겠지만 이런 백정들이나 나가는 교회에는 못 다니겠다는 이야기었습니다.
박씨가 열심을 내어 전도한 결과로 백정들의 가족들 132명이나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박씨의 아들 박봉출은 세브란스 의학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05년 8월 1일에 현재의 승동교회 위치로 옮겼는데 비용은 곤당골 터를 팔아 9,000원(당시 일본돈), 미국 필라델피아에 계신 쟌칸버스라는 분이 기부하신 500원하고 나머지는 교인들의 헌금으로서 각각 평균 33일 동안의 품삯에 해당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예배당들이 사방에 너무 많아서 선교회 돈으로 건축한 일은 없었습니다.
단 한가지 예외로 각 도에서 하나의 큰 교회를 중심으로 하고 지교회에서는 필요한 크기 이상의 집회나 도 사경회 등을 위한 목적으로 선교회에서 보조한 일이 있었는데 경기도에서는 그 대상이 승동교회였습니다.
예배당 동쪽에는 기숙사들을 지어서 농촌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이 숙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도 사경회는 해마다 정월에 모였었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배운 성경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쳤습니다.
1905년부터 현대식 국민학교를 시작했는데 박학면씨가 남학생들을 한옥주씨는 여학생을 가르치다가 학교를 승동으로 옮긴 후로는 이덕준씨가 선생으로 수고하셨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이유한씨가 첫 장로겸 전도사로 일보시다가 첫 번째 안수 목사가 되셨습니다.
대홍은과 김심철씨들은 전도부인으로 농촌에서 수고를 많이 하고 농촌 여자들을 많이 가르치고 시내에서도 굉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1953년 제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 김심철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셨습니다. 몸이 다 굽어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으니 전쟁 때 서울에서 피난가시지도 못한 듯 하였습니다. 저의 기억으로는 신신백화점 뒤 어딘가 계셨던 것 같은데 제가 한번 찾아 뵈었더니 반갑게 맞아 주시며 같이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교회가 승동(現인사동)으로 옮길 시절에는 이 근바엥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반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교인들은 백정들을 피하느라고 연못골(現연동) 교회로 옮겨가기도 했습니다.
1906년 곽안련 목사니므이 보고에 의하면 "백정 문제가 우리 교회에서는 제일 어려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백정들에게 전도하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문제와 또한 박씨 형제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까지는 교회 조직이 잘 안될 모양이다"라고 했습니다.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그가 보고한 교회 운영 전반에 걸친 사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 예배당은 그전 건물보다 평수가 약 12평이나 더 크게 지었는데도 이사해 온지 한달도 못되어 너무 좁아서 늘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붕을 벗기고 북쪽 벽을 헐어 평수를 약 두배 정도 크게 하니 바닥에는 약 백명 정도는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리비는 교인들이 모두 담당했습니다.
연보는 전보다 많았는데 학교사업, 기독교서회, 성서공회, 자선사업, 전도사업, 운영비, 예배당 수리비 등 총 352.64원으로 증가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교역자 봉급을 반 정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책방은 길가에 있었는데 일년동안 성경 524권, 쪽복음 1,720권, 기타 다른 책을 4,118권이나 팔았습니다.
<기억할 점은'성경'이라고 하는것은 신약성경을 말합니다. 1910년대까지도 성경전서(신구 합본)는 발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책'이란 겨우 30가지 정도 밖에 안되었으며 그 중 큰 책으로는 '천로역정'밖에 별로 없었습니다.>
책방 앞 거리에서는 매일 몇 시간씩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1907년 8월 곽목사님의 또 다른 보고에 의하면 예배 참석자는 전해보다 두배나 되어서 평균 259명 정도 모이고 때로는 400여명까지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 일년 동안 세례를 받은 사람은 23명, 유아세례는 2명, 새 학습인은 46명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세례교인이 129명, 학습교인이 54명이나 되었는데 그 밖에 하와이나 멕시코로 옮겨간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 하와이나 멕시코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연보도 잘 나와서 남자 학교는 자립하였고 여학교도 약 반 정도는 자립하였다고 합니다.
전도부인은 1906년 11월부터 봉급을 드리고 있었는데 열심히 봉사하고 계셨습니다.
어느 농촌 교회의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을 하여 약 20원이나 거둔 때도 있었고, 한해 동안 연보 총액은 536.48원에 달했습니다.
여학교 학생 수는 22명, 남학교는 30명을 넘게 되었답니다. 학생면려회는 1907년 정월부터 여학생들도 참가하도록 해준 결과로 많이 발전하여 어떤 때는 2~3시간이나 걸리는 모임도 있었고, 너무 재미있게 운영되었으므로 부모들과 다른 어른들도 방청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평균 집회수는 50명 정도 이었지요. 모임 때마다 토론을 벌였는데 남학생과 여학생의 좌석을 휘장으로 갈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랄만하게 회의진행법을 잘 따랐다고 합니다.
(당시 영배당 중간에 휘장이 있었는데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앉았으므로 강단에 서신 목사는 양쪽을 다 볼 수 있었지만 교인들은 서로 못보게 했습니다. 이 휘장이 1930년경까지 두고 있었습니다.)
학생회 모임은 한 회원이 일어나서 약15분 동안 설교를 하면 다른 회원이 하고... 이렇게 해서 몇명의 회원이 설교를 마친 후에 회장이 일어서서 성적을 발표하고 석차를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책방에서는 책을 6,729권을 팔았는데 이 사업도 자립하도록 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교회 조직도 발전하여 집사 6명을 택하여, 둘은 재정을 보고, 둘은 학교 사업을 맡고, 둘은 전도부인과 자선 사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 권찰들고 두었습니다.
그런데 1907년 2월에 성령의 크신 능력으로 부흥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온 교회가 크게 움직였습니다. 성령의 인도 아래 교인들이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힘을 합해서 길선주 장로를 평양으로부터 모셔오도록 비용을 담당했습니다.
(기억할 점은 1907년의 한국 교회의 대 부흥 운동은 길선주 장로의 교회를 비롯해서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힘을 합해서 신학교의 첫 열매인 일곱명 졸업생들에게 선물도 보내드렸습니다.
이들이 곧 한국 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최초의 일곱 목사이었던 것이니 그등 중 한분이 바로 길선주 목사이십니다. 이 일곱 목사는 1907년 9월 한국장로교회가 조직된 후의 첫번째 목사들입니다.
승동교회가 이렇게 시작되어 온 것인데 그 동안 여러가지 문제도 있었고, 축복도 있었고, 좋은 기회들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성령이 그 가운데 크게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교회의 문제들과 축복들은 새로운 형태의 것이고 그 전과 같지는 않지만 성령은 옛날과 같이 아직도 크게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할 새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옛날의 조상들처럼 충성드럽게 봉사하고 일하도록 합시다

- [ 곽안전(Allen. D. Clark) 선교사]
- - 1908년 11월 6일 서울에서 출생
- - 부친은 승동교회 곽안련(Charles A. Clark) 목사
여동생은 곽가전(Clark. E. Katherine) 선교사 (영남지역 활동) - - 미네소타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
- - 1933년 북장로선교본부 파송으로 한국으로 재입국
- -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에 의해 부친과 추발 귀국
- - 1953년 한국전쟁 후 재 입국, 장신대 교수, 피어선신학교 학장, 대한성서공회
- - 1973년 정년퇴임 후 본국으로 귀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