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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역대 당회장] [9대 김익두 목사] 김익두목사의 부흥회와 그 특성, “한국의 무디”
글쓴이 관리자 (SEUNGDONG)  (203.244.212.22)
날짜 2018-03-22
조회수 6002

김익두목사의 부흥회와 그 특성, “한국의 무디”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교수하는 양현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한국교회의 대부흥사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거대 인파가 운집했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종들을 택하여 은사를 주시고 알맞게 사용하신다.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Billy Sunday” 혹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리는 김익두 목사! 그는 실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보기 드문 흔적을 남긴 부흥사이다. 일제치하라는 민족적 아픔의 역사 한 가운데서, 그리고 민족상잔이라 불리는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꿋꿋하게 복음을 외치고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 사랑하다가 결국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한 신실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물론,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숫자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김익두 목사의 업적을 드러내기 위해 숫자 사용을 즐겨했다.


그와 관련된 저작물에서 그의 사역을 정리하는 숫자적 통계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그 통계의 규모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필자는 본 논고를 통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를 연구하려 한다. 김해연에 의하면, 김익두 목사는 총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약 28,000번의 설교를 했고, 약 10,000명의 병자를 치료했다.
이러한 그의 부흥회의 특성은 무엇이었는지, 또한 그의 부흥회가 (굳이 세속적 표현을 빌리자면) “성공”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초기 한국 교회 목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익두 목사 역시 자료를 남기는데 역점을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776회라는 그의 부흥회 전체를 모두 검토하여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전성시대(1920년대)에 있었던 몇 몇 주요한 부흥회에 관하여서는 당시 선교사들이나 신문 등이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그의 부흥회의 특성과 방법론 그리고 그 영향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김익두 목사 부흥회의 특성


1) 거대한 인파가 운집한 부흥회

   

김익두 목사 부흥회의 특성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의 부흥회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운집했다는 것이다. 일단 그의 부흥회가 개최되면 수십 리 밖에 거주하던 사람들까지도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교회당이 비좁아 교회당 밖 야외로 나가서 설교를 해야만 했었던 적이 수차례이었다. 당시의 교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설교를 한두 번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인구수를 염두에 두고, 또 당시의 도로망과 교통수단 그리고 대중 매체 수단의 열악함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그의 대중성과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가히 추측할 수 있다.

 

1920년 8월 황해도 신천에서 열렸던 부흥회에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함으로 인해 교회당 뜰까지 가득 찼으며, 이 때문에 본 교회 성도들은 부흥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1920년 8월 황해도 사리원 부흥회 역시 4-5천명이 군중이 운집하여 교회당 안팎은 물론이려니와 담장 위와 지붕 위에까지 가득 찼으며, 교회당 밖에는 간이음식점과 과일 상인들이 몰려 임시 장터가 개설되었다.


1920년 10월 황해도 연백 부흥회나 함경남도 원산 부흥회에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특별히 원산 부흥회에서는 성경공부에만 수천 명이 모였고, 병 고침을 받은 수만도 180명이었다. 1920년 10월 서울의 일곱 장로교회 연합 부흥회 역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이 부흥회의 매일 새벽예배에 700여명이 참석했으며,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야외 강단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사람들이 운집했다. 이 부흥회는 특별히 당시 한국에 거주했던 선교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목회신학 교수였던 Clark은 “[김익두 목사가] 주최한 1920년 서울의 부흥회에는 5천 명이 운집했으며, 실내에 그 많은 사람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음으로 밖에서 설교했다”고 기록했다. Rhodes는 “서울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없는 부흥회”이었다고 증언했다.


Gale은 “한국교회사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표적”이라고 하면서 “수천 명이 모이는 오전 4시부터 7시까지 계속되는 아침기도회와 사람들이 마당과 담장과 계단과 난간까지 차지한 저녁집회는 확실히 경이로움이 가득 찬 광경이었다”고 묘사했다.


1921년 경산남도 마산 부흥회의 경우 그날이 설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이 모였으며, 함경북도 성진에서 개최된 부흥회의 모습을 “운집하는 신도 및 병자가 매일 수천 명에 달하는 대성황”이라고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1929년 11월 평양 부흥회를 목격한 어느 선교사는 “적어도 1,200명 이상이 모인 새벽 기도회 …… 평양 최대의 교회는 이 특별한 부흥회에 참석한 군중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고 묘사했다.


2)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부흥회


김익두 목사 부흥회의 두 번째 특성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했다는 것이다. 1920년 6월, 평양지역 장로교회 연합 부흥회가 장대현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 부흥회는 당시 기독교 학교이었던 숭덕학교를 정식 중등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기금 조성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개최되었다.
매 예배 때마다 4-5천 명이 참석한 이 부흥회의 분위기는 매우 뜨거웠다. 당시 평양에서 20년 활동했던 베테랑 선교사 Bernheisel이 “이런 부흥회는 결코 본적이 없다”고 할 정도이었다.


이 부흥회에 관하여 「기독신보」는 아래와 같이 자세히 보도하였다.
“평양부 장로파 일곱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청하여 한 주일 동안 부흥회를 열었다. 방법은 아침 네 시 반에 새벽기도회하고 오전 열시에 지원자들만 “말라기”공부하고 오후 두 시 반에는 일반 교인이 다 모여 예수 재림 공부하고 밤에는 강설회로 모였다. 첫 날에는 수 백 명이 모이더니 마지막에는 몇 천 명이 모였다. 그리고 주일 오후에는 장대현 예배당 마당에서 만 여 명이 모여 예배하고 숭덕학교 위하여 육만 원 연보가 나왔다. 돈으로는 삼 만여 원, 토지가 이만여 평이고 부인들은 다례를(월자) 다 풀어내었는데 칠백 쌍이었고 그 다음은 지환과 패물과 남녀의 시계와 의복과 의복가음과 놋기명과 탕건과 기타 물품이 수 삼 백 종이다.


돈을 던진다, 의복을 던진다, 가락지를 뺀다, 시계를 뗀다, 머리를 푼다, 절수를 써 바친다 하는 광경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세상 사람이 보면 꼭 미쳤다 하였을 것이다. 참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다.
또는 수 백 명 병인이 나음을 얻었다. 그 중에 예를 들면 평양 도익순 집사의 처남이 십여 년 동안 귀가 막히었다가 이번에 열리었고, 양성춘 장로의 부인이 78년 동안 중병으로 고생하다가 이번에 꼭 나았다. 그 밖에도 누구누구 20여년, 10여년씩 고생하던 병을 다 고치었다. 그래서 부근 외촌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으러 오는 병인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고로 병인들이 김목사를 너무 따라다니며 괴롭게 하여서 배를 태우고 대동강으로 나갔더니 병인들이 어떻게 알고 또 배를 타고 따라 옴으로 대동강 상에서 또 병인을 위해 기도했다. 이번에 예수교를 허무하다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과 안식일 지키지 않으면 구원 못 얻는다든 안식교 교인들의 입을 봉하게 되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수밖에 없다. 찬송하리로다.”


「동아일보」는 이 부흥회로 인해 “평양시가 비인 듯” 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수천 명 군중은 미친 듯 취한 듯 신경을 걷잡지 못하여 어느 무명씨는 즉석해서 숭덕학교를 위하여 일만 원을 기부하니 뒤를 이어 일어나는 기부의 소리는 미쳐 수습할 길이 없이 답지하여 천원, 혹은 오백 원씩 내어 놓는 이가 무수하며 현금을 가지지 못한 부인들은 머리에 꽂았던 비녀와 월자 등속과 손에 끼였던 반지 가락지 까지 기부하였는데, 월자가 칠백여 쌍이고 금반지가 오십여개요, 은장도가 20여개, 기타 시계와 의복과 유기반상 별별 가지 기부가 산같이 쌓여 현금과 합하여 계산하니 거의 육만 원에 달한지라 실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더라 하였더라.”

 

    

1920년 10월 서울의 장로교회 연합 부흥회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강력했다. 「기독신보」는 당시의 상황을 “경성교회 불세례-김익두 목사의 부흥전도 만 명의 큰 무리가 은혜의 목욕”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전했다.


“경성 중앙 승동 교회에서는 지난 11일(월요)부터 동 25일(월요)까지 부흥전도를 부흥목사 김익두씨를 청요하여 개최하였었는데, 저녁마다 전도, 새벽마다 여섯시의 기도, 오전, 오후에 성경교수 이렇게 한 결과로 성신의 큰 역사 곧 이적이 나타났다. 신앙이 타락하였던 자가 다시 회개하였고 교만하던 자가 겸손하여졌으며, 미지근한 자가 열심이 일어났으며, 병든 자가 나았으며, 조막손이가 손을 폈으며, 나면서 앉은뱅이가 일어섰으며, 기타 심상치 않은 병자가 나은 자가 남녀 기십이있었으며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자원 연보한 것이 금은보배와 밑 현금 합하여 오 천 여 원에 달하였더라.


이적에 대하여서는 아직 구체적 조사를 받지 못함으로 차후에 일일이 기재하여 확실히 증명하려니와, 첫째로 이적은 만 명의 큰 무리가 밤을 새워 기도하며 회개의 뜨거운 눈물을 흘린 것이로다.
이는 사람의 수단으로 하려 함도 아니요, 다만 기도와 십자가의 도를 전했을 뿐이었나니 여기 대하여는 성경이 확실히 증거 한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멸망하는 자에게는 어리석음이 된다” 함이니라. 경성교회에는 은혜의 비가 내렸고 사회에게는 어떠한 경성을 줌이러라. “예수 가라사대 아바지여 천지의 주재시니 이 일을 지혜가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외다”고 찬송하심을 우리 신도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더라.”


김익두 목사의 또 하나의 기념비적 부흥회는 1920년 5월에 개최된 부산 부흥회이다. 「동아일보」는 이 부산 부흥회에 관하여 “김목사의 이적-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걸어가”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보도하였다.
“황해도 신천군 읍내교회 목사 김익두 씨는 지난 1920년 5월17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진 교회에서 부흥회를 가졌는데, 크게 재미있고 성황리에 이끌어 가던 중 특별히 놀랄만한 일이 있었다. 김목사의 안수 기도로써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는데, 그 병 고침을 받은 자는 부산진 좌천동 446번지에 사는 김낙언씨의 아들 두수(8세)이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우연히 앉은뱅이가 되어 8년 동안을 서지 못하고 이 세상을 슬프게 지내 왔었다. 그러다가 김목사가 부산에서 집회를 할 때 기어서 예배당에 찾아와 김목사 곁에 앉았고 김목사는 이 소년이 병으로 고 생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안수기도를 하여 주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즉시 일어나서 걷게 되었는데 그 기뻐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고, 오늘도 여전히 걸어 다니는 것을 보는 사람마다 목사를 칭송하여 신도가 많아졌다. 또 김목사는 이번 남방으로 와서 이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는 중 밀양군 교회에서는 18세 된 여자 벙어리를 고쳤다. 각 지방에서 병 고친 수가 많으니 22명은 전부 낫게 하였고 18명은 반을 낫게 하였다는 소문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분위기가 매우 뜨거운, 어떻게 보면 사람이 통제할 수 없어 보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무질서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러한 분위기였다. 엄청난 인파가 운집하여 찬양, 회개, 치병, 헌금 등이 어우러진, 마치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3. 김익두 목사 부흥회의 성공 요인

당시의 선교사들이나 신문들의 증언을 통해서 보건데, 김익두 목사 부흥회의 규모와 그 부흥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민경배가 단언한 대로, 김익두 목사는 “한국 교회의 부흥회를 대명할만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사람들이 그토록 김익두 목사에게 열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즉, 그의 부흥회가 그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1) 대중을 사로잡은 설교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원인은 그의 설교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탁월한 설교자이었다. 그는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과 그들이 처한 환경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설교를 청중들에게 접목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과 감각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김인서는 그를 “불같은 열정과 다양성을 가진 설교자”라고 평했을 것이다.

① 서민적 언어와 화법을 사용한 설교

김익두 목사 설교의 첫 번째 특징은 그의 화법이다. 그는 거칠고,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Gale은 1920년 서울 부흥회 때의 김익두 목사의 화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는 서울 사람의 세련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평범한 촌부이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들으려고 관심 있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세련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지적으로 꾸며진 말보다 더 가치가 있는 그만의 독창성이 있었다.

김익두 목사의 이러한 화법에 대해 Rhodes는 김익두 목사의 배경, 즉 “한학이나 현대 지성에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민경배가 묘사한 “대중 집회성에 대한 그의 감각”때문이었다고 본다. 즉, 그의 화법은 그가 이해한 청중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당시 보편적인 한국인들을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가난함, 소박함, 겸손함, 무지함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과 동류의식을 주는 단어를 사용하고 화법을 구사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화법은 그의 설교가 가난하고 병들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에게 환영을 받게 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었다.

물론, 김익두 목사가 그러한 화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내용까지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설교는 때로 매우 날카롭고 예민해서 청중들의 마음 깊은 데를 터치했다. 특별히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설교할 때는 온 청중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때로 무 원고 설교를 하기도 하였는데, 청산유수와 같이 열변을 토해 설교함으로 청중들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어 집중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독특한 말솜씨를 구사하는 희대의 설교가”이었던 것이다.

② 내용이 성경적이면서도 삶과 관련된 실제적인 설교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의 힘, 소박한 신앙, 윤리적 삶, 그리고 고난 이후 낙이 온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의 설교의 주요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회개, 천국 등이었다. 사실 그의 설교 내용은 의외로 단순했으며 성경적이었다.

또한 그의 설교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삶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는 기독교 윤리에 합당한 개인 삶을 요청했다. 그는 주일성수와 철저한 십일조 헌금을 강조했다. 비기독교적인 것, 미신적인 것, 불신앙적인 관행, 무당, 서물 숭배 등을 금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은 당시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삶의 문제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설교는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들의 경계를 확실하게 하는 것들로서 핍박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됨의 확실한 대가를 각오하게 함으로 분명한 신앙인이 되도록 했으며, 이러한 분명한 경계선의 확립은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성장하는데 큰 유익함을 가져왔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당시 대부분의 부흥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세지향적 종말론을 담고 있었다. 물론 그의 그러한 설교가 한국 교회를 탈 역사적으로 만들었다는 비판 또한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고난은 곧 끝나게 되며,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그의 종말론적인 설교는, 당시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 하에서 슬픔과 고난과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한민족에게 시기적절한 설교이었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가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던 소외층에게는 큰 위로와 공감을 주는 설교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가 율법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의 눈으로 보건데, 그는 율법주의자도 금욕주의자도 아님은 분명하다. 그의 설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복음적이었고 실재적이었다. 그의 설교는 당시 슬픔과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구원과 소망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주재용이 말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는 이 부흥운동의 경험으로 민족적 비운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며 앞으로 한국 교회가 뚫고 지나가야 할 수많은 어려움을 해결해 갈 수 있는 예지와 내적 정신적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③ 재미있게 구사된 시청각적 설교

김익두 목사 설교는 재미있었다. 그의 설교는 어려운 설교가 아니었다. 그는 그 자신의 경험이나, 생활 속에 흔히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성경의 쉬운 예화들을 그의 독특한 화법과 시장터 언어를 사용하여 풀어 놓았다. 그럼으로 회중으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고 설교에 집중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종종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관습과 인습에 관해 설교했다. 그러한 설교를 통해 미신을 타파하고 불신앙적인 관례나 행사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러한 설교를 할 때면 익살과 유머가 넘쳐 났다. 스스로 무당의 흉내를 내기도 했으며, 직접 가위를 들고 강단에서 상투를 잘라주기도 했다. 시청각을 사용한 재미를 제공함으로 청중의 집중력을 유지했으며, 궁극적으로 청중의 삶을 개화시켰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설교자라 할 수 있겠다.

④ 영과 삶으로 철저히 준비된 설교

설교가 단지 인간의 노력과 달변, 그리고 강단 위의 모습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설교는 지극히 영적인 일이며, 나아가 설교자의 삶이 뒷받침 되어야만 한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는 영과 삶으로 철저히 준비된 설교이었다. 그는 한편의 설교를 위해 열 배 이상 기도하였다. Rhodes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가 갖는 모든 능력의 원인을 그의 “기도하는 습관”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또한 금식하면서 금식기도를 설교했고, 십일조 헌금을 드리면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설교를 했으며, 그 자신이 먼저 주일을 성수함으로 주일성수를, 그리고 철저히 도덕적으로 살면서 도덕적으로 살라고 설교했다. 이처럼 기도와 삶으로 준비된 영적인 설교이었기에 청중들은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십자가에 관해 외치거나 회개하여 심판을 면하라고 외치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더불어 청중들은 순식간에 불같은 열기와 정서적 감동에 빠졌고, “한편에서는 찬송하는 소리, 한편에서는 회개하는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은 눈물과 찬송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2) 치병사역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원인은 그의 치병사역이다. 그의 부흥회에는 엄청난 인파가 회집했다는 사실을 전술한 바 있다. 사실 엄청난 인파가 모인 그의 초대형 부흥회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어 그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런데 이러한 초대형 부흥회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김익두 목사의 치병능력이었다.

① 치병 사역이 자리 잡게 된 과정

김익두 목사의 치병 능력은 그의 목회 초창기인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1901년 재령읍 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박수은(16세)이라는 여자가 까무러친 일이 있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그 여자를 살려냈다. 그 이듬해 신천교회에서 시무할 때, 어떤 정신병 든 여자를 위해 “내 생명을 멸하여 이 여인을 살리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일주일을 기도했다. 그 결과 그 여자는 정상인이 되었다. 이처럼 그의 목회 초기부터 간헐적인 치병 사건들이 있었다. 치병사역이 자리 잡게 된 결정적 순간은 1919년 10월 평안남도 열패교회 부흥회 때 찾아왔다. 김익두 목사는 마가복음 16장 17절의 “믿는 자에게는 이런 이적이 따르리니”라는 말씀에 강력한 영감을 받았다. 그는 “만약 병자를 치유하는 주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한다면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는 병 고침의 능력을 주시지 않겠는가? 내가 믿음을 갖고 그 능력을 간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이 너무 약하다”고 고백했다.

그 후 김익두 목사는 주께서 은사를 주시면 지금도 사도시대와 같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하였고, 그 약속된 성경 말씀이 입증될 수 있도록 주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시무하던 신천 교회의 홍경순의 중병을 안수기도로 치유했다. 이것이 그의 치병능력의 확신과 확인이었으며, 그 이후 치병사역은 그의 부흥회의 전형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가 치병부흥회가 된 첫 번째 부흥회는 1919년 12월에 개최된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 부흥회이었다. 그곳에는 10년간 아래턱이 떨어져 입을 다물지 못하는 박수진이라는 병자가 있었다. 그는 늘 수건으로 아래턱을 받쳐 머리 위에 두르고 다녔다. 김익두 목사는 박수진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금식하며 삼 일간 기도했다. 나흘 째 되는 날 그의 아래턱이 위로 올라붙는 기적이 나타났다.

1920년 4월 25일에서 5월 1일까지의 대구 남성정 교회의 부흥회는 기적과 은사, 그리고 찬양의 대부흥회였다. 회심자가 808명이요, 교회 학교를 위한 헌금이 5만 여원에 이르렀으며, 치병을 경험한 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1920년 5월 17일부터 일주일간의 부산 교회 사경회에서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앉은뱅이) 불구자 좌천동 김낙수의 아들 두수(8세)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로 인해 일어서서 걷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는데, 「동아일보」는 “김목사의 이적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걸어가”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그 이후 김익두 목사의 치병 부흥회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고 이슈가 되었다. 치병은 그의 부흥회의 전형이 되었으며 상징과 표적이 되었다. 「기독신보」는 그의 부흥회에서 나타나는 치병현상을 “세계 3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보도하기도 했다. 박용규는 김익두 목사 치병 부흥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부흥집회에 모이는 사람들만 하여도 혼잡한데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왔으며, 또 김목사 가까이 앉으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더 많은 혼잡을 빚었고 심할 때는 그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자 하는 병자들도 있어서 흡사 복음서의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② 치병사역의 특징

김익두 목사의 치병 부흥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특징은 그의 치병 사역이 세 시기로 나누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그의 사역 초기 때로서, 병자에게 개인적으로 안수 기도를 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병 고침이 즉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한 병자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했고, 또 모두가 치유된 것도 아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병자가 너무 많이 몰려옴으로 인해 집회 끝에 각 질병 단위로 구별하여 따로 앉혀 기도하여 치료하던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로는 1920년 서울 집회 때부터 나타난 현상으로 병자 쪽의 신앙으로 인해 김익두 목사를 바라만 보아도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나던 시기이다. 김익두 목사 치병 사역의 두 번째 특징은 그의 치병 사역이 매우 건전한 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치병 사역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기하신 능력의 열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선교사들의 증언이 있다. Bernheisel는 김익두 목사가 “사람을 고칠 능력을 가진 것으로 스스로 주장한 일은 절대 없었다”고 증언했다.

Gale은 “내가 참석한 부흥회에서, 그는[김익두] 자신이 병을 고칠 수 없다고 고백할 뿐이지, 병 고침을 장담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모든 것은, 병자들이 깨끗한 마음으로 강력한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아마도 응답하실 것이고,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Rhodes 역시 “김목사 자신은 결코 그가 고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병자들을 위한 기도하는 성경적 방법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하면서 “그의 방법은 성경적”이라고 결론지었다. Rhodes는 그의 또 다른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의 방법에 있어서 건전하며 성경적이다. 그는 그가 위해서 기도하는 병자에게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뭔가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예수의 이름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병자와 병자의 친구들에게 믿음을 활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는 모든 병자가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김익두 목사가 치병사역을 위해 한 일은 오직 기도였다. 실제로 그는 서울 승동 교회 집회 때는 10일간 금식기도하면서 집회를 인도했다. 그의 치유사역 부흥회는 성경에 의존하는 정통신학 위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치병 사역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이단이나 유사 이단이 되었음에 비해, 김익두 목사는 그가 순교하기까지 정통 장로교 목사로서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김익두 목사 치병 사역의 세 번째 특징은, 치병을 체험한 자들로 하여금 즉 각적인 공개 간증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즉각적인 치병 체험 간증자들이 사리원 부흥회 때에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장대현 교회 부흥회 때는 120명이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치유 받은 자들의 즉각적인 공개 간증은 온 회중을 감격시키기에 충분했다. 평생 걷지 못하던 11세 된 불구자가 걷게 되자 사람들은 “어린 듯 미친 듯 박장하는 소리 집이 떠나가는 듯”했다. 「동아일보」는 평양집회를 “미친 듯, 취한 듯 흥분된 신경을 걷잡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즉각적인 간증은 전략적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가져 온 것으로 분석된다. 즉 각적인 간증을 통해, 치병의 영적이고 실제적인 효과를 극대화 시킨 것이 사실이다. 즉, 즉각적인 간증을 하게 함으로 치병자들의 신앙을 공고히 했을 뿐 아니라, 치병이 교회 성장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게 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김익두 목사는 시대를 앞서간 탁월한 교회성장 전략가이었다고도 평가된다.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의 네 번째 특징은 그것이 적잖은 비판과 반대에 부딪혔다는 사실이다. Rhodes는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은] 그의 부흥회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반대자들이 일어나게 했다”고 말했다. Clark 역시 “[치병사역]의 결과로 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병사역 부흥회는 당시 사회전반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논란을 야기했다. 지식인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을 “종교의 진리를 떠나 미신에 기울어진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비판자들은 치병에 대한 강한 의심을 품었고, 심지어 간도 부흥회에서는 “반종교파”들이 부흥회 장소에 난입하여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의 다섯 번째 특징은 치병의 사실성이다. 비록 의심과 비판과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진실한 사건들이었다고 믿어진다. 당시 선교사들이 김익두 목사의 치병 사역의 사실성을 인정하였다. Bernheisel은 김익두 목사의 치병 이적을 믿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의료선교사인 McLaren은 김익두 목사의 치병 사역을 검토한 이후, 다소 부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병은 의학적인 용어로 신체장기조직(the organic)이 아닌 신체 기능적(functional) 영역에서만 일어났다”고 증언함으로서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의 실재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민경배는 김익두의 치병사역의 진실성을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치병의 확실성을 믿는다. ‘이젹명증회' 회원의 범위와 그들의 광범위한 실지조사, 그리고 사진과 서간의 자료들을 위작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걸친 그의 부흥운동이 사기와 위작으로 지탱되리만큼 역사가 애매하지는 않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의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는 증거는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조선예수교이젹명증』이라는 책자이다. 이 책은 김익두 목사의 치병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황해노회 임택권 목사를 중심으로 한 26명의 목사와 장로가 “이젹명증회”를 조직하여 1919년 12월부터 1921년 1월까지의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을 조사하여 수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약 100건의 치병 사건이 사진과 더불어 수록되어 있는데, “본 명증 회원들이 친히 상고하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친히 참예한 일”만을 모아 편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나가는 글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규모에 있어서 초대형이었으며 성령이 강력하게 임한 초자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특성들로 인해 사람들의 비판과 의심을 받았다. 더불어서 김익두 목사 자신은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과학주의자들의 모멸을 받았고, 그리고 지식인들의 냉소를 받았으며, 심지어 교회들에 의해서도 무지하고 천박하다는 조소를 받았다. 또한 훗날의 교회사가들은 김익두 목사의 치병사역이 동반된 내세지향적인 설교로 인해 청중들은 현실도피로, 그리고 한국교회는 탈 역사적으로 인도되었다고 비판한다. 어떤 이들은 김익두 목사야말로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기복적인 신앙생활의 기초를 제공한 장본인이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후대의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익두 목사는 그의 부흥회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였음이 분명하다. 당시의 방황하는 민중들에게 희망을 전달하여 고달픈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그 이후 한국 교회 부흥회의 전형이 되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 교회 부흥회의 뜨거운 기도, 치유사역, 풍성한 헌금, 예배형식, 감성에 대한 파격적인 호소, 서민적이고 직설적인 어법 등은 모두 김익두 목사의 영향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결론적으로, 김익두 목사는 분명 하나님께서 한국을 위해 부르신 자라고 믿는다. Bernheisel의 평가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그의 위치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주님께서 조선 땅에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사도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증거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를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 왔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무거운 책임의 자리에 김익두를 세우신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일제치하의 고난 받는 민중들을 위해, 각종 세속화의 과정(사회주의 발흥, 무신론의 득세, 자유주의 신학의 범람, 교회의 침체 등) 속에 있는 한국 교회를 위해 김익두 목사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능력 주심으로 민족 구원의 대역사와 교회성장을 이룩하셨다고 믿는다. 그의 나타남은 한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권고였다. 그는 한국 교회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는 김인서의 표현대로 “사도행전의 기사를 20세기에 재현”한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요약 정리: 김순정 목사

기사입력시간 : 2015년 06월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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